2011/07/11

폭주하는 중국 「반일」의 뒤에는 시진핑 차기국가 주석


원래 기사는 2010112일에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뉴스를 오늘 보게 되었습니다.

[단독]중국에 '100만평급 한국형 신도시' 수출


그런데 위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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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력과 군사력을 업고, 하고싶은 대로 하고 있는 중국. 그걸 침묵하며 보고 있는 「저자세」 민주당정권. 중국은 완전히 일본을 얕보고 있다. 데모에서 소소한 혐오까지, 중국은 「반일」의 깃발을 일본을 향해 흔들고 있다.

대규모 데모의 진정한 「목표」

「十七届五中全会決定増補習近平為中央軍事委員会副主席」 (중국어는 잘 모릅니다.)

 1018일오후638, 중국 국영 신화사통신은, 25문자의 뉴스를 전송했따. 이 보도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제 17기 중앙위원회 제5회 전체 회의(5중전회)에서, 시진핑(習近平) 국가 부주석(57), 중앙군사위원회부주석에 취임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국가부주석은, 230만 인민해방군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인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주석에 선출되었다는 것은, 다시말하면 후진타오(胡錦濤) 군사위주석(67)의 자리를 이어받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2012년 가을의 제18회 공산당대회에서, 중국의 최고권좌인 공산당 총서기의 자리를, 그리고 다음 13년 봄의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각 주석의 자리를, 후진타오로부터 이어받는다는 의미이다. 사실상의 「차기 국가 주석」의 탄생이다.

 이 결정에서 시계를 2일 되돌보자. 16, 중국 사천성의 성도를 시작으로 3개의 도시에서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구尖閣) 문제로 일본에의 항의 데모가 발생했다.

 1개월 전에 일어난 데모보다, 과격해졌다. 종래의 데모보다 참가자의 연령이 낮아진 것, 카메라 앞에서도 얼굴을 감추려는 모습도 없었던 것 등, 대담한 행동을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현지 취재했던 기자)

  「오키나와를 해방하라」라는 플랭카드를 들거나, 일본 기업의 간판을 부수거나,  제멋대로의 군중. 그들의 행동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멋대로 말하는 중국 정부를 그대로 닮았다.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가 일단 침체되었지만, 또다시 댜오위다오(센카쿠)에 함시선을 파견해, 또다시 동아시아해의 가스유정을 일방적으로 채굴하는 등, 무례를 일삼는 중국. 민주당 정권에 대항 수단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일본은 완전히 당하고 있다.

 10월 중순, 중국은 센카쿠(댜오위다오)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고 은밀히 타진해왔지만, 이걸로 일중관계(ㄱㄴㄷ순)가 개선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다. 시진핑이 중앙군사위원회부주석에 임명된 것, 또한 이번의 데모의 「진짜 목적」을 알면, 이후 양국의 관계가 악화되리라는 건 명백하다.

 5중전회는 자기 국가 주석의 탄생을 대내외에 어필하는 중요한 회의이다. 그 와중에 대규모의 데모가 일어나는 것은, 지금까지의 중국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번 데모가 일어난 장소가, 사천성의 성도, 면양(綿陽)이라는, 군과의 강한 연대를 가진 도시(성도는 군사산업이 활발한 도시로, 면양은 핵병기 연구 시설이 모여있는 도시)이라는 점이다.

 보통이라면 용인될 리 없는 대규모의 데모가, 군사 관련 도시에서 일어난 점에 관해, 「이번의 데모는 군관계자가 관여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지적을, 중국정치에 정통한 연구자가 하였다.

 「댜오위다오(센카쿠) 문제를 은폐해서 지나가려는 현 중국 수뇌부에의 항의의 의미가 있을 겁니다. 원래 온건한 외교를 전개하는 후진타오 주석과, 해양 권익의 확장을 꾀하는 군부의 관계는 좋지 않았습니다만, 센카쿠(댜오위다오)의 건으로 대립이 격해졌습니다. 반면, 중앙군사위원회부주석으로 취임한 시진핑과 군부의 관계는 좋지요. 이번의 데모는, 후진타오 주석에 대한 항의과 같이, 시진핑에게 『당신이라면 군부의 생각에 찬성하겠지』라는 메세지를 전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연구자가 말하듯이,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과 인민해방군은, 강한 연대를 가지고 있다. 요코하마시립대학의 矢吹晋 명예교수가 설명한다.

 「시진핑의 아버지仲勲는 원래 중국 건국의 공로자로, 군내부에서도 넓은 인맥이 있었습니다. 시진핑은 이 아버지의 인맥을 활용해 군부에 침투해, 군부도 시진핑을 『같은 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진핑이 칭화대학을 졸업한 후, 배속된 것이 耿飈 전 국방부장의 비서였습니다. 이것은 군부가 시진핑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죠.

 이 두 세력이, 센카쿠(댜오위다오)문제와 5중전회를 거쳐, 더욱 친밀해졌다는 것이다.

 이 친밀한 관계가, 일중외교의 관계자는, 이후의 일중 양국의 관계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 앞의 중국연구자의 이야기..

 「시진핑에는 권력의 안정을 위해서, 군부의 요구에 답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후의 대일정책은 더욱 강건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시진핑 부주석의 행보를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야심 덩어리인 남자

 자기 국가주석으로 내정된 시진핑이지만, 지금까지의 길은 평탄하지는 않았다. 일본에서는 「작년(2009) 12, 일왕과 회담한, 덩치 큰 남자」 정도의 인상인 시진핑은, 중국 국내에서도 그다지 화려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시진핑의 아버지 習仲勲(2002년에 88세로 별세), 부수상이나 국회부의장등을 역임한 대물 정치인이었다. 별명은 『主席跟班』(모택동 주석의 그림자), 모택동주석이 자신의 아들처럼 아낄 정도였다. 하지만, 사소한 행동이 「모택동 비판」했다는 걸로 오인, 옷을 벗게 된다.

 수십년 후에 명예 회복이 되었지만, 이 때문에 차남인 시진핑은 『習仲勲의 아들』이라는 뒷담화를 매우 싫어한다.

 「시진핑은 명문의 칭화대학화학공학부를 졸업하고 수년후, 『아버지 영향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고 해, 스스로 福建省(복건성에 내려갔습니다. 그 후 17년간, 오로지 복건성에서 피땀흘려, 자력으로 한걸음한걸음, 출세의 계단을 올랐습니다.

 그 간에 習仲勲은 명예를 회복했지만, 동세대의 친구 薄熙来(전 상무상으로 현 重慶市 충칭시의 톱), 아버지의 권력을 빌어 출세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중국공산당관계자)

 고난의 길을 거친 시진핑은, 2002년이 되어서야 겨우 복건성을 떠나浙江省 절강성에서 5년간 당위서기(성의 톱)를 하였습니다. 그 후, 2007년에 상하지시 톱의 당위서기로 취임해, 8개월간 일하던 중, 당 중앙의 상무위원으로 발탁되었다. 상하이 시에서 직속 부하였던 인물의 증언에 의하면

 「상하이에 온 시진핑 서기는, 추운 와중에도, 거의 매일, 시의 각 부서에 취임 인사를 다녔습니다. 1500명이나 되는 시 간부에의 인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주위의 시나 성에 인사를 다녔습니다. 놀라웠던 건, 당 중앙 승진이 내정된 후에도, 다시 1500명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참 예의바른 분이셨죠.

 이러한 착실한 노력의 결과, 중앙 정계에 들어설 기회를 얻은 시진핑은, 도대체 어떤 공적을 세워, 차기 주석의 자리에 오르게되었을까.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큰 공적은 특별히 「보이지 않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진핑은,江沢民의 옆에서, 『복건의 톱』으로 불린 黄菊의 적자로 보였다江沢民의 감이 좋았습니다. 이 점은 충분히 유리하지만, 2009년의 위구르족의 반란을 진정시킨 것 이외에는, 중요한 공적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실적이 없어도, 시진핑에는 주석 자리에 대한 강한 야심이 있었습니다.(공산당관계자)

 중국의 격한 정쟁에 발목잡히지 않도록, 발언이나 행동에는 필요 이상으로 진중한 시진핑. 중국 정계에서는 현 국가 주석의 후진타오와 전 국가주석인 江沢民의 끝나지 않는 권력 투쟁이 반복되었지만, 시진핑은 江沢民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한편, 절대로 胡錦濤을 적으로 돌리지 않게 주의를 쏟고 있었다. 매일매일 줄타기를 하며,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절묘한 밸런스 감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후진타오와의 격심한 권력 투쟁

 胡錦濤의 본심은江沢民의 영향을 받은 시진핑이 아닌, 자신이 키운 李克強 부수상을 후계자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꼭집을만한 결점 실점이 없는 시진핑을 내쫓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후진타오 주석은, 시진핑의 「차기 주석 내정」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앙군사위원회부주석의 취임을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후진타오는 시진핑에 의한 지배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후진타오는, 『중국의 푸틴이 될』 야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시진핑을 후계자로 받아들지이 않으면 안 될 거면, 그 주위를 자신의 적자들로 채워, 시진핑을 메드베제프 러시아 대통령 처럼, 자신의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해둘 속셈입니다. 그리고 5년간, 시진핑의 힘을 묶어둔 후에 은퇴해李克強이나, 내몽골 자치구 톱인 바로 다음 세대의 胡春華에게 바톤 터치해 줄 속셈입니다.(공산당 관계자)

 시진핑에게, 생각하기도 싫은 시나리오일 것이나, 후진타오는 착착 「수렴청정」을 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겨우 주석 자리에 올라도, 권력은 커녕, 후진타오에 잡혀 사는 상태는 견딜 수 없다. 하지만, 눈에 띄는 공적이 없는 시진핑은, 후진타오에 대항할 수단이 적다.

 그 적은 대항수단 중 하나가, 군부인 것이다. 앞에 말한 바처럼, 시진핑은 후진타오 주석에 비해, 군부와의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등소평 이래로 온건한 외교를 전개한 후진타오가 수렴청정을 꾀해 권력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은, 군부에 있어서는 원하는 바가 아니다. 이 관계를 이용해, 시진핑은 군부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군부를 이용하는 건, 시진핑에게 있어 양날의 칼과 같다, 라고 공산당 관계자는 말하고 있다.

 「군부에 의존하는 것은, 그들의 희망사항을 최대한도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시진핑 전권의 외교는 자연히 공격적이 되어, 특히 대일 정책은 현 정권 이상으로 강건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진핑 주석" 하에서는, 일중 관게의 악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또 한가지,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제적인 기반이다.

 80년대의 등소평은, 관동성에 심천등의 경제 특구를 만들어, 대량의 외자를 유치해, 그 자본을 활용해 권력 기반을 안정화시켰다. 또한 차세대의 江沢民은, 90년대에上海浦東地区 상하이 푸둥지구에 경제 특구와 주식시장을 만들어 외자를 유치, 그 자본을 활용해 장기 정권을 세웠다. 그리고 후진타오가 활용한 것이, 북경의 부동산 버블과 天津 티안진의 浜海新区 개발이다.

 이 처럼, 중국에서는 외자를 활용하지 않으면 정권을 안정시킬 수 없다. 그럼, 시진핑에는 경제적인 기반이 있을 것인가. 공산당관계자가 해설한다.

 「시진핑은, 자신이 유일하게 장악하고 있는 『福建閥복건파』를 사용해, 후진타오에 대항하려고 하고 있습니다福建閥는, 해협을 끼고 있는 바로 옆의 대만의 자본을 의미합니다. 복건성과 대만을 경제적으로 일체화해, 그 자본을 바탕으로 중남해의 권력 투쟁에 이겨, 그대로 대만 통일을 꾀하는 비젼을 세우고 있습니다.

 실제, 시진핑은 복건성 근무 시절에 대만으로부터의 투자 유치 정책에 전력을 다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인 일체화를 진행시키면 통일도 빨라진다」를 주장해, 대만과의 경제 교류 촉진의 선봉에 있었다.

 일본과는 적이 된다.

 이러한 시진핑의 노력의 결과, 올해 912일에 ECFA(해협양측경제제휴계획협의)가 발효되었다. 중국과 대만과의, 사실상의 자유 무역협정이다. 이것에 의해 , 중국은행과 교통은행등이 대만에의 사무소 개설 신청을 시작했으며, 이후 대만의 「인민폐 경제권화」가 급속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성장이 유망한 복건성-대만의 경제력이, 시진핑의 희망 사항인 것이다.

 실은, 중국연구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시진핑은 복건·대만의 지지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댜오위다오(센카쿠)문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보고 있다.

 「센카쿠문제가 일어났을 때, 중국 이상으로 대만에서 격한 일본 반대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댜오위다오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인식은, 중국과 대만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진핑은 자신의 권력의 원천인 대만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리고 점차 대만과 정치적으로 일체화를 진행하기 위해, 이후 이 문제를 클로즈 업 시켜 『일본은 중국 대만 공통의 적』으로 어필하는 것으로, 대만의 관심을 사려고 하겠죠」(외무성중견관료)

 시진핑과 일본의 관계는, 결코 적대적이지는 않다. 복건성에서 근무할 때에는, 그는 몇번이고 일본을 방문해, 도쿄뿐 아니라 지방까지 순회하였다. 일본의 기초가 튼튼한 기술이나 서비스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에, 일중간의 경제 고나계를 발전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후진타오와 같이 강하다. 하지만, 그 반면에, 댜오위다오 문제에 관해서는 대만과의 관계때문에, 그리고 군부와의 관계 때문에라도, 극히 심각하나 태도를 취할 것이다.

 시진핑의 권력기반이, 일본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조직인 이상, 이후의 대일정책이 보다 강해지리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일본이 지금까지의 유약한 상태로 있다면,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는 대국에, 일순간에 말려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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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LH공사에서 신도시를 수출하는 친저우시는 앞에서 말한 복건성보다 좀 더 남쪽에 위치해있음.

 소설을 쓰자면, 살아있는 권력인 후진타오가 후계자를 견제하기 위해 복건성 바로 옆에 있는 친저우시를 개발해, 복건성 개발의 명분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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